불교에서 해탈은 모든 속박과 집착, 아집에서 자유로운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탐, 진, 치가 끊어진 자리인 열반과 더불어 해탈은 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경지입니다. 이런 해탈을 석가모니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이루어내었습니다. 그가 행한 방식은 위빠사나 명상입니다. 그렇기에 쉼 없는 명상은 해탈로 이르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한편, 위빠사나 명상은 분석 명상이라고도 얘기합니다. 즉, 해탈의 뜻과 이의 실현을 두고 계속해서 쪼개고 쪼개고 쪼개나가며 분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든 속박에서는 어떻게 벗어나는가? 집착과 아집을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상태이고, 이는 진정 이룰 수 있는 것인가?
이와 같은 질문들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내던지면, 우리는 해탈 실현 과정을 충실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싯타르타와 같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단연코 힘듭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출발선 상에 서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해 고민하고 고통받았으며, 왕자라는 자리마저 내던져, 모든 것을 내버리고 해탈에 목숨을 걸겠다는 의지로 출발선에 섰습니다. 이에 반해 우리는 사회 속 일원으로 10분 명상조차 바쁘다는 핑계로 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체험이 아닌 단지 이론상으로만 막연하게 해탈의 뜻과 이의 실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이겐 헤리겔이 쓴 '마음을 쏘다, 활' 에서 해탈에 대한 느낌을 잘 서술하여 소개합니다. [어쩌면 해탈은 자기와 외계의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것과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이어지는 물아일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책의 주된 주제인 활쏘기에 대해 '활과 표적, 화살 그리고 활쏘는 자신' 이 완전히 혼연일체를 이룬 것을 해탈에 비유합니다. 이처럼 물아일체가 되어 표적을 맞추겠다는 처음의 의식조차 무의식의 영역으로 넘어간 상태에서는, 표적을 맞추겠다는 집착과 아집조차 없으니 해탈이라는 자유로운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종교적으로 해탈은 더 큰 개념일 수는 있으나, 또 달리 생각하여 부분 속에 일체가 있다(프랙털 구조)고 한다면 물아일체의 느낌과 해탈의 느낌을 동일시해보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습니다.